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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지진 (1) "행복을 나를 수 있도록" 고베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그날"이 다시 찾아온다. 1995년 1월 17일 이른 아침, 매그니튜드 7.3의 거대 지진이 발생해, 진원지에 가까운 고베나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지진에 의한 건물의 도괴, 화재 등에 의해 6400명을 넘는 인명이 빼앗겨 도시는 괴멸 상태가 되었다. 연장자들은 고베가 다 태 버린 "고베 공습(1945년)" 의 재래(再来)라고 말했다. ↓ 생매장된 사람의 구조 작업을 하는 이웃 주민들 ↓ 화재 연기로 덮인 시가지 방면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초등학교 음악 선생님인 "우스이 마코토"(臼井眞)씨 가 "행복을 나를 수 있도록"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고베에 있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는 매년 "1월17일"이 다가오면 이 노래를 부르고 돌아가신 수많은 분들의 명복을 빈다. 고베에서는 .. 더보기
나의 "박치기" (추가) Stand by me 중요한 것을 하나 쓰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K씨와 결혼할 때 또 그 후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해 고민하고 있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뻗쳐준 인생의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영화 "박치기"에서 주인공의 "코우스케"가 "사카자키"로부터 격려를 받은 것처럼… 그 은인 가운데 몇명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의 이름은 걸어 준 말 (마음!) 과 함께 지금도 내 마음에 확고하게 새겨져 있다. 자신들만으로 인생의 길을 열어온 것은 아니다. 나의 바로 곁에 서고 지탱해주신 분들, 정말 고마워요! (↑) 가수 고 Roger Ridley 씨가 노래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정말 그대로다. 노상 라이브를 하고 있는 Santa Monica Beach (Los A.. 더보기
나의 "박치기" (3) 생명의 빛 보통 나는 아내가 재일한국인임을 말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숨기려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는 재일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하면 틀에 박힌 "눈"으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혼할 때까지 힘들었지않아? "라고 "동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물론 고생은 있었는데 일본인끼리, 한국인끼리의 결혼에서도 부부는 고생을 함께 하는 것일 것이다. 또 "너들의 결혼은 한일 우호로 이어질 것야"라는 선의의 "격려"를 받기도 있지만 우리는 "국가"나 "민족"을 짊어지고 결혼한 것도 아니다. 물론 왜 왜 그녀의 부모님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왔는지를 생각할 때 그 배경의 모든 것을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거기에 "역사"가 개재하고 있는 것도 또 명백한 것이다. .. 더보기
나의 “박치기” (2) "경자"의 눈물 대한교회의 한국어 강좌에 다니게 되어 재일한국인 2세들과의 교류도 시작됐다. 또 일세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생겼다. 일본어의 읽기, 쓰기를 배우고 전차 표를 스스로 사서 멀리까지 나갈 수 있게 된 기쁨을 말한 오모니의 이야기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2세의 친구들에게 가르쳐져 한일 근현대사에 관한 책도 읽기 시작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침략 지배한 자들의 "말예"로서 그 역사를 배우는 것은 좀처럼 기분이 무거운 일이기도 했다.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직후에 한국에서 박 대통령 사살 사건이 일어나 (1979년 10월), 또 다음 1980년 5월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광주시민·학생들의 투쟁은 일본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조금 전에 들른 서울에서 멀리 남쪽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 더보기
나의 "박치기" (1) 어머니 학교 JR 교토역의 남동쪽에 "히가시쿠조"(東九条)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재일 Korean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며 일본 영화 '박치기'(이즈쓰 카즈유키 감독, 2005년 ↓)의 무대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약기해서 "동구"(東九)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이 영화 (시대 배경은 1968년경) 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1:26:28 부터 마지막의 30 분을 보세요. 그런데 1978년부터 약 40년 간 히가시쿠조에 있는 대한교회에 재일 Korean 1세의 어머니들을 위한 식자 학급(識字学級) "어머니 학교"가 개설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월요일 밤) 일과 집안일을 마친 어머니들이 교회 집회실에서 일본어 읽기/쓰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본 학교의 교사와 대학생들 (재일 Korea.. 더보기
미야코 하루미 (2) "임진강" 미야코 하루미씨가 노래하는 "임진강". 귀중한 영상이 있다.(2000년) 또 인터뷰에서 그녀가 그 노래를 부르게 된 때 까지의 마음속에 있었던 여러 갈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뷰 부분도 간단히 번역해 봤습니다.) 하루미 씨가 기모노가 아니라 치마초고리를 연상시키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하루미씨는 어떤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을까? "임진강" 는 직접적으로는 한반도의 "분단"과 그 슬픔을 주제로 한 노래이다. 그러나 위의 하루미 씨의 인터뷰에 있듯이 일본 사회 속에도 "분단"이 있고 또 하루미 씨 자신 속에도 "아버지가 한국사람이고 어머니가 일본사람이다" 라는 정체성의 "분단"이 있다. 말을 바꾸면 "임진강" 는 일본사회 속에도 하루미씨 속에도 흐르고 있는 것.. 더보기
미야코 하루미 (1) "천년의 고도" 아시는 분도 많다고 생각한데 "미야코 하루미" (都はるみ)라는 여성 "엔카” 가수가 있다. "엔카" (演歌)는 old type의 유행가이고 한국의 trot와 좀 비슷한 것 같다. 미야코 하루미씨는 1948년에 교토에서 태어났다. "미야코"(都)는 오래 동안 수도(首都)였던 "교토"(京都)를 의미하는 이름이다. 하루미씨가 자란 지역은 "니시진"(西陣)라고 한다. "니시진 오리"(西陣織)라고 불리는 직물(옷감)을 짜는 집(가내 공업)이 옛날에는 많이 있었다. 일본인뿐만아니라 재일한국인들도 많이 니시진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루미씨의 부친도 그런 한 사람였다 (경상북도 출신). 일본의 전통적인 "기모노"를 대표하는 "니시진 오리"를 한국인들이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뜻밖에 많다. 이야기를 처.. 더보기
신촌 블루스 "마지막 블루스" 한국 노래가 일본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 시기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부터 예를 들어 "연락선은 떠난다" 나 "목포의 눈물'" 을 커버한 일본인 가수도 있었지만 조용필 씨 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의 대 히트에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1990년대 초 무렵 블루스를 좋아해서 신촌 블루즈를 자주 듣고 있었다. "신촌 블루스 라이브 앨범"이라는 타이틀의 CD를 통근의 왕복에 자주 듣고 있었다. 엄인호 씨의 블루스 기타는 물론 가수 한영애 씨, 정경화 씨, 김현식 씨의 노래도 훌륭했다. 라이브 앨범 속에서는 특히 "마지막 블루스"가 가장 블루스다워서 좋았다. 정경화 씨의 애절하게 노래하는 가창법이 노래의 정감을 더 깊게 해서 내 마음을 사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