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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발자취

나의 "박치기" (1) 어머니 학교

JR 교토역의 남동쪽에 "히가시쿠조"(東九条)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재일 Korean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며 일본 영화 '박치기'(이즈쓰 카즈유키 감독, 2005년 ↓)의 무대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약기해서 "동구"(東九)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이 영화 (시대 배경은 1968년경) 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1:26:28 부터 마지막의 30 분을 보세요.

 

 

그런데 1978년부터 약 40년 간 히가시쿠조에 있는 대한교회에 재일 Korean 1세의 어머니들을 위한 식자 학급(識字学級) "어머니 학교"가 개설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월요일 밤) 일과 집안일을 마친 어머니들이 교회 집회실에서 일본어 읽기/쓰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본 학교의 교사와 대학생들 (재일 Korean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많았다) 이 자원봉사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또 이 교회에는 재일 Korean 2세 등을 대상으로 한국어 강좌도 같은 시간대에 놓여 있었다.

 

1979년 초 방랑생활에 매듭을 짓고 미국에서 "자주 퇴거"한 나는 서울 경유로 낯익은  교토로 돌아와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민족 minority community에 살았던 것, 또 귀국시에 서울에 들렀던 적도 있어 재일 Korean 사회에 이전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를 조금 공부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와 달리 한국어 학습서도 없고 민간 한국어 교실도 거의 없는 시대였다.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히가시쿠조의 대한교회에서 한국어 강좌가 열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979년 9월의 어느 밤 일을 마치고 나는 조금 긴장하면서 히가시쿠조에 있는 대한교회를 혼자 방문한 것이었다. 교회 접수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습니다만…" 라고 물어보니 흔쾌히 맞이해 주었다.

 

 

선생님과 일대일로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어머니들은 10여명이었던 것 같지만 한국어 강좌(초급 레벨)  수강생은 적었다. 동년배의 재일 2세가 2명, 그리고 일본인이 1명 있었다. 그리고 내가 끼어서 4명이 되었다.

 

선생님은 한국 유학 경험이 있는 재일 2세의  C선생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유학 중에 민청학연사건(1974년)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학을 도중으로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일본인의 수강생은 히가시쿠조 지역의 초등학교 선생님, О씨였다. 그는 재일 Korean 학생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서 그들·그녀들을 위한 교육(지금의  '다문화 공생 교육') 에 열심히 맞붙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이 끝나고 나서 한국어를 배우러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수강생도 모두 동년배이므로 수업이 끝난 후 근처의 선술집이나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 ) 집 에 들러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했다. 머지않아 나는 같은 판의 재일 여성과 사귀게 되었다.

 

(계속)

 

 

히가시쿠조"(東九条) 에 있는 오코노미야키 (お好み焼き) 집  (↓)  

메뉴표에는 "박치기 스페셜"이라는 오코노미야키도 있다(0:30).
"이즈쓰 감독 추천"이라고도 적혀있다. 영화 촬영중 감독도 여기서 오코노미야키를 먹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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