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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 (7) "레이테 전기" 오오카 쇼헤이의 "전쟁터 체험"에 대해서는 "포로기(俘虜記)", "어느 보충병의 싸움"에 자세히 나오고 있다. 특히, 양서에 수록돼있는 "잡힐 때까지" (1948년)의 서술에 있는, 패잔(敗残) 일본병을 추적해 오오카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젊은 미군병을 "왜 쏘지 않았는가? "라는 자기 분석의 철저성과, 그 후 자살을 시도하지만 다할 수 없어서 포로가 될 과정에 대한 투철(透徹)한 묘사에는 압도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오오카의 작품은 그러한 문학성 이상으로, 내가 알 수 없었던 "전쟁"이라는 것, 그것은 전쟁이 시작되어 종결할 때까지의 정치 외교 과정이나 군사론(戦史)이 아닌, 일반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어떻게 살고, 싸우고, 죽어 갔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는 거의 유일한 "교과서"로서였다. 내 아버지가.. 더보기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6) 내면에서의 싸움 행운히 아내와 "눈물의 이별"을 할 수 있었던 오오카 는 도쿄 시나가와(品川)역에서 군용 열차를 타고 큐슈 북단의 모지(門司)에 도착했다. 거기서 며칠 기다린 후, 1944년 6월 27일, 필리핀 전선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탔다. 바다를 보면서 오오카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나는, 이 전쟁이 가난한 일본의 자본가들의 자포자기(自暴自棄)와, 낡은 생각을 고집하는 군인들의 허영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전쟁 때문에 내가 희생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힘이 없는 내가 그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상 어쩔 수 없다. " ("출정 出征") 이렇게 일본의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을 갖고 있으면서도 "반항"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오오카는 더욱 다음.. 더보기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5) 1937년 “남경 함락(南京陥落) ” 여기까지 작가 오오카 쇼헤이가 자신의 입영, 출정(出征)등 의 군대체험을 둘러싸고 말해 왔다. 그런데 당시 동세대의 1%대에 불과했던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생과 대졸자들은 일본사회가 군국주의에 점점 경사해 가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우선 일본 역사년표를 보면서 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의 "발자국"을 그 시대에 겹쳐 보면… 1909년 3월, 오오카 ,출생 1910년 5월, 대역 (大逆)사건...천황암살을 계획했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들을 체포, 사형을 집행한 원죄(冤罪)사건. 1910년 8월, 한국병합 (식민지 지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15년 8월, 내 아버지, 출생 1925년 5월, 치안유지법 성립 1925년 12월, 교토학련 (京都学連) 사건…교토대, 도시사대(同志社大) 등 사.. 더보기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4) 아내와의 면회 한 사람과만이라면 면회가 허용되됬다. 오오카는 고베에 남긴 아내를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내가 전선으로 보내져 패군 속에서 죽는 것은 같은 일이다. (아내와 만나는 것은) 미련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출정", 이하 같다) 그리고 가족을 대신해 면회에 오는 친구에게 유서를 맡기기로 했다. (↑ 유서, 일부) "살아 돌아갈 생각이지만 죽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쩌면 혼자서 아이를 키울 생각이 되겠지만 그것은 반드시 나의 소망이 아니다. 행복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재혼하기에) 헤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료의 한 사람으로부터 "너는 그래도 좋을지도 모르지만 부인의 마음 속을 생각해보라. 한 번만으라도 만나고 싶을지도 모르겠잖아! " 라고 충고해주었다. 오오카.. 더보기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 (3) 교육 소집(召集) 전전의 징병 제도의 대략은, 나 나름의 이해이지만, 다음과 같은 일이 될까. 프랑스 혁명을 통해 근대 국가는 국민 전병제도(皆兵制度)를 정비한다. 일본에서도(패전까지), 남자(국민)가 20세가 되면 징병 검사를 받는 것이 "의무" 였다. (식민지 징병제도의 도입 문제는 지금은 언급하지 않다.) 다만 대학생에게는 징병검사의 유예가 있었기 때문에(대학 진학률 1% 미만의 시대, "특권"였다, 그들은 졸업 후에(23세 경), 검사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징병검사에서는 신체적인 장검 (壮健)함이 주된 평가축으로 되어 갑종(甲種), 제1 을종(乙種), 제2 을종(乙種), 병종(丙種), 정종(丁種), 술종(戊種)으로 나뉘었다. 검사의 결과 합격이 된 후 즉시(검사의 다음해 1월) 입영하는 가능성이 높은 것은 ".. 더보기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 (2) 소집(召集) 때까지 이번에는 오오카 쇼헤이 "어느 보충병 (補充兵)의 싸움"에 수록되고 있는 "출정"을 소개하고 싶다. "출정" (出征)… "입대하고 전쟁터에 가는 것"(일본어 사전 「大辞泉」) "출정"의 "정 (征)"은 "정복한다"의 "정"이기 때문에 "출정"이란 자의적(字義的)으로는, "전쟁터에 간다"라고 하는 중립적인 의미보다는, "적을 토벌하러 간다"라는, 자기(국가)를 정의(正義)로 간주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일것이다.. 그러나 많은 일반 병사의 의식에서는 "출정"은 역시 "大辞泉" 사전이 설명하는 것처럼 "전쟁터에 가는 것"라는 의미였고, 또 "죽음에 다가가는 것" 을 의미했을 것이다. 오오카 쇼헤이의 "소집" 때 까지의 길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9년 4월...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입학. 프랑.. 더보기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 (1) 처음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읽는 책이 있다. 그 하나는 작가 오오카 쇼헤이 (大岡昇平 1909 -1988)의 "부로기 (俘虜記)" (1949년, 내가 태어난 해이다), "레이테 전기 (レイテ戦記)" (1971년) 다. 오오카라고 하면 "들불 (野火)" (1952년)일지도 모르지만, 그 소설보다 한 병사의 심리적 사실을 그려 또 전장의 전체상(全体像)을 부감 (俯瞰)한 위의 2권은 몇번이나 읽어 왔다 . 그리고 이번에 오오카 자신의 군대생활(입대에서 귀환까지)을 그린 "어느 보충병 (補充兵)의 싸움"을 읽었다. (↑ 1950년대에 발표된 단편 작품을 모은 책.) 오오카는 일본의 패전의 해, 1945년에 필리핀의 민드로 섬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격전지의 하나였던 레이테 섬의 수용소로 옮겨져, 같은 해 11월 .. 더보기
고베 지진 (2) "만월의 저녁" 1995년 1월17일 아침에 일어난 고베 대지진 후에 몇개 노래가 태어났다. 전회 소개한 "행복을 나를 수 있도록"은 주로 학교에서 불리는 노래인데 음악live등에서는 "만월의 저녁"이라는 노래가 자주 연주된다(↓). 1995년 1월17일 밤은 하늘에 "만월"(満月)이 걸리고 있었다. 노래 가사 (↓)에 "바라보는 광경에 할 말을 잃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도 당시 그런 상태였다. 도로가 물결치고 빌딩이나 가옥이 늘어서 도괴하고 있는 거리를 걷고 있으면 수직·수평의 기준을 모르게 되어, 평형 감각을 잃어 버린다. ↓ 집 근처의 시장도 다 도괴했다. ↓ 도괴한 고가선 옆을 가족·지인의 구원을 위해 사람들이 오갔다. 평형 감각을 잃어 버린 나는 몽유병자 처럼 비틀거리고 있으니 신호기의 깨진 교차로에서 교통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