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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2) 1969년 1월... 우리 대학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국가 (정부) 와 자본(산업사회) “에 종속해 “자치정신”을 잃어버린 대학당국에게 개혁을 요구해, 단체교섭을 몇번이나 했다. 하지만 결렬됬어서 우리 학생들은 각 학부의 건물을 책상과 의자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전면 봉쇟했다. 몇일 후 대학본부의 시계탑에 Che Guevara의 거대한 포스터가 붙여됬다 (↓). 그 스트라이크 투쟁은 대학당국이나 정부 (문부상, 文部省)와 싸웠던것만으로 아니었다. 확실히 전공투 운동은 대학개혁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자기들의 발밑을 그대로 해 두면서 말만으로 ""개혁 "이나 "반전(反戦)"을 외치는 것은 기만이아닐까, 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회속에서 자가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나란 누구냐 ,.. 더보기
대학 시절 (1) 1968년... 잊어버리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는 해이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의 사이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들은 지금도 가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다. 그 시기를 그냥 그리워하는 것은 할 수 가 없다. 나는 1968년 4월에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식 당일, 행사가 거행될 대강당앞에서는 선배들이 반전 (反戦) 집회를 열고 있었다. 입학식에 참석할까, 아니면 집회에 참가할까 나는 좀 고민했다. 대학총장의 지루한 인사를 듣는 것보다도 "하네다 투쟁" (월남전쟁에 반대하는 시위) 에 참가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집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집회에는 다른 신입생도 몇 영이 참가하고 있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웃었다. “너도 바보 같은 놈이야 ” 라고.. ↑ 하네다 투쟁... 더보기
고등학교 시절 1966년,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 나이의 젊은이는 누구나 어느 정도 체제적인 것에 대해서는 반항적이다. 학교, 어른,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에의 반발... 그 무렵, 미국에 추종해 베트남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있던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집회에 처음 참가했다. 특히 정치적인 동기도 없고, 단지 자신을 억제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왠지 저항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의 눈을 훔쳐 담배를 피우듯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교칙을 깨는 것만으로도 해방적인 기분이었다. 아이 취급을 받지 않게 어려운 책도 좀 읽어보기도 했다. 어느 때는 Modern Jazz를 듣고 있던 친구로부터 LP 레코드를 빌렸다. John Coltrane의 'My Favorite Things'였다. 'Free J.. 더보기
가네다 씨의 눈물 (3) 나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일을 이것저것 되돌아보고 있으면 문득 Angela Aki (안제라 아키) 씨가 노래하는 "편지, 15살의 당신에게"라는 노래가 생각나았다. 이 노래는 일본 TV방송국 NHK가 주최하는 "전국 학교 합창 콩쿠르 중학생부문"의 과제곡으로서 Angela Aki 씨가 2008년에 발표한 것이다. 그 후 큰 반향을 불러일켜 중학교 졸업식등에서도 자주 불리게 되었다. Angela Aki 씨는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미국인의 "double"다. "half"아니다. 이 노래는 셋 부분으로 구성된다. 일 절 가사는 지금 "15세의 내"가 "미래의 나 (어른이 된 나)"에게 보내는 편지, 다음 절은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대답하는 편지이고 .마지막 절 가사는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 더보기
가네다 씨의 눈물 (2)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자습 시간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 같이 끝났다. 다음 가정과 수업에는 담임의 М선생을 대신해 여자 선생님이 온다. 그것은 이날에 한한 것이 아니고 평소의 일이었다. 같은 반의 놀이 친구인 야스다 (安田) 군이나 시라이 (白井) 군은 교실을 빠져 나갔다. 가정과 수업이 되니 (무서운 М선생이 없기 때문에), 2, 3명이 교정에 빠져 나가고 멋대로 노는 것이 자주 있었다. 선생님이 교실에 되돌아오게 부르러 갈 것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날"은 되돌아 오지 않았다. 야스다 군도 시라이군도 재일 코리안이였다. 왜 그 날, 그들은 교실에 되돌아 오지않은 것인가, 그 까닭을 나는 상상했다. (야스다군은 "안"군이고 시라이군은 "백"군이라고 후에 알게 됬다.) 그런데 나가 고배(神戸)의 소학교에.. 더보기
가네다 씨의 눈물 (1) 어렸을 때 고배항(神戶港)이 바라보이는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5학년 때였을까 (1960년 경) 어느 날 자습시간에 "사건"이 일어났다. 담임의 М선생은 때때로 학생 쪽에 시선을 돌리면서 교탁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M선생은 갑자기 "가네다(金田), 너의 가족은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한 여학생에게 향해 물은 것이다. 자습하고 있었던 학생들의 손이 일제히 멈추고 교실내의 공기가 긴장했다. 모두는 눈은 책상에 떨어뜨린 채, 가네다(*) 씨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학교 지구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있고 가네다 씨의 본명이 "김"씨이고 그녀가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교실에 흐.. 더보기
첫 한국, 서울1979 (3) 다음날 아침 일찍 명동을 어슬렁거렸다. 출근 시간이 된 것인지 직장에 향하는 인파가 보였다. 나는 그 흐름에 역행되게 걷고 있었다. 경복궁에서 만난 어린이들의 눈과는 다른 더욱 날카로운 어른들의 시선을 느꼈다. 나를 '이물(異物)'처럼 보는 시선이 내 몸을 찔렀다. 명동의 아침은 흰색의 거리였다. 오후에 명동에서 남산공원을 향하는 길을 올라갔다. 도중에 젊은 커플을 만났다. 그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 카메라 셔터를 찍어 달라고 하는 손짓했다. 카메라를 받고 파인더(finder)를 들여다봤다. 두 사람은 매우 행복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셔터를 눌렀다. 'Thank you'라고 그들이 말했다. 아침부터 느끼고 있었던 답답한 느낌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디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더보기
첫 한국, 서울1979 (2) 경복궁에 겨우 도착했다. 여기에서도 잘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경복궁내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을 때 소풍으로 온 초등학생의 집단을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나의 모습을 보자마자 '우와...'라고 소리를 높이면서 뛰어 왔다. 무슨 일인가? 애들이 무엇인가 말하고 있지만 전혀 모른다. 모두가 작은 노트와 연필을 나에게 내밀면서 무엇인가 써 달라고 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은 장발,콧수염...가죽점퍼, 청바지, 선글라스(sunglass)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Los Angeles에서의 긴 생활에 의해 나는 상당히 'Mexican 멕시코인'같은 분위기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외국선의 선원 같은 분위기... 어쩌면 외국인에게 싸인을 해 달라고 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