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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 (3) 교육 소집(召集)

 

 

전전의 징병 제도의 대략은, 나 나름의 이해이지만, 다음과 같은 일이 될까.

 

프랑스 혁명을 통해 근대 국가는 국민 전병제도(皆兵制度)를 정비한다.

일본에서도(패전까지), 남자(국민)가 20세가 되면 징병 검사를 받는 것이 "의무" 였다.

(식민지 징병제도의 도입 문제는 지금은 언급하지 않다.)

 

다만 대학생에게는 징병검사의 유예가 있었기 때문에(대학 진학률 1% 미만의 시대, "특권"였다, 그들은 졸업 후에(23세 경), 검사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징병검사에서는 신체적인 장검 (壮健)함이 주된 평가축으로 되어 갑종(甲種), 제1 을종(乙種), 제2 을종(乙種), 병종(丙種), 정종(丁種), 술종(戊種)으로 나뉘었다.

 

검사의 결과 합격이 된 후 즉시(검사의 다음해 1월) 입영하는 가능성이 높은 것은 "갑종" 합격자이다.

병역기간은 약 2년. 평시 (平時)라면 그 후 제대한다.

 

나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대학을 통해서 럭비 (rugby football)를 하고 있었던 적도 있어 신체가 장건 (壮健)했기 때문인가, "갑종" 합격이 되어 즉시 입영했다. 이처럼 징병 검사에 합격하고 그대로 입대한 병사를 "현역(現役)"이라고 했다.

 

오오카 쇼헤이는 징병검사 결과가 '제2 을종'이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는 입영하지었던 것이다.

다만 평시 (平時)에는 갑종 합격자만으로 현역병은 충분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그렇게는 안 된다.

 

제1 을종은 현역병이 부족해지면 "보충병"으로 소집을 거는 첫 번째 후보가 된다. 그 때문에 미리 병사로서의 교육을 실시해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을 "교육 소집"이라고 했다.

 

제2 을종은 평시에는 소집이 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전시 (戦時)가 되면 "제1을종"으로 올리거나, 혹은  "교육 소집"의 명령을 받거나 했다.

 

제2 을종의 오오카가 징병 검사시로부터 약 10년 후에 "교육 소집"을 받은 것은 1944년 3월.

이미 장년(壮年)이 되어 35세였다.

그런 나이(병사로서는 '고령')의 사람도 병사로 해야 할 정도로 일본(제국주의)은 모리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 소집은 오오카의 경우 3개월이었다.

교육 기간이 끝나면 "제대" (민간인에게 돌아온다)가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제대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소집으로 온 백명중 절반정도였다.

오오카는 "보충병"으로서 전선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교육 소집이 종료된 날, 제대가 정해진 자와 전선으로 보내지는 것이 정해진 자와의 사이에 생긴 어색함에 대해서 오오카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교관은 “제대하는 자는 사복(私服)로 갈아입고 즉시 영정(営庭, 병영의 광장)에 정렬! ”라고 해서  (전선으로 보내지는) 우리의 얼굴을 보지 않도록 옆을 보는 채 떠났다. 어수선한 순간이었다. 이별의 인사를 할 여유도 없다. 떠나는(제대하는) 사람도 우리에게  거는 말도 없을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사복에 갈아입는 그들의  모습은 남는 자의 가슴을 도려냈다."

 (오오카 “출정”)

 

 

물론 오오카 개인으로서 보면 그때 제대가 되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이 "불운"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 문학에 있어서 보면 오오카가 보충병이 되어, 필리핀 전선에 보내진 것은 "행운"한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다.

남방의 섬에서 귀환을 이루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누군가가 전장의 병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그 죽은 자들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수(숫자)"로 밖에 말해지지 않는  "물건"이 되어 버린다.

 

오오카는 전후에 전사자들 의 눈으로 "레이테 전기" (レイテ戦記)등을 쓰기 위해서 "누군가"에 의해 필리핀 전선으로 보내졌다고마저 생각하고 싶어진다.

 

오오카 쇼헤이의 전쟁문학은 다른 작가와 달라서 철저히 "한 병사의 눈"으로 일반병사의 "일상"을 그린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도시근로자의 생활이나 사고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35세라는 나이였던 것,

"현역"이 아니라 보충병이며 이등병이라는 최하급 병사였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탕달을 읽어 연구해서 단련한 비평정신을 가진 지성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조건도 투철한 관찰이나 분석, 또 서술의 시점을 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무언가로서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사진은 1956년경에 찍어진 것 같다. 오오카, 43세. 좋은 사진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