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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6) 내면에서의 싸움

행운히  아내와 "눈물의 이별"을 할 수 있었던 오오카 는 도쿄 시나가와(品川)역에서 군용 열차를 타고 

큐슈 북단의 모지(門司)에 도착했다.
거기서 며칠 기다린 후, 1944년 6월 27일, 필리핀 전선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탔다.
바다를 보면서 오오카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나는, 이 전쟁이 가난한 일본의 자본가들의 자포자기(自暴自棄)와, 

낡은 생각을 고집하는 군인들의 허영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전쟁 때문에 내가 희생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힘이 없는 내가 그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상 

어쩔 수 없다. " ("출정 出征")

이렇게 일본의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을 갖고 있으면서도 

"반항"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오오카는 더욱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범한 봉급 생활자는 소위 반전 운동과는 관계는 없었고, 

쇼와(昭和) 초기(1930년 전후)의 전향(転向) 시대에 어른이 된 나는, 

권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아무리 강한 사상가라도 동요시켜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속에 조금도 반항의 욕망을 느끼지 않았다." ("출정")

여기서 말하는 "쇼와 초기의 전향 시대"란, 

당시  군국주의 국가와 대치 있던 지하공산당원이 다수 검거된 대탄압 사건이나, 

당원가 고문(拷問)을 받아 대량으로 전향한 것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 국내에서의 "반전, 반군 운동"은 숨통을 끊어졌다고 봐도 된다.

그런 시대에 오오카는 '평범한 봉급생활자'의 길을 택했다.
당시 문단에 군림하는 "대작가"들이 파시즘운동에 가담해가는 가운데 

오오카는 적어도 그러한 "처세술"만은 하지 않겠다고 결의해 

문학자가 아니고 "봉급생활자"(샐러리맨) 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밖으로의 "출구"를 거절한 오오카는, 그러나 이 때부터 "내면에서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고베에서 회사원이 된 오오카는, 근무하면서 스탕달 연구를 정력적으로 진척시켜 

번역 작업을 계속해간다.

"문학은 그만뒀다고 생각하고 고베에 갔는데, 그러나 스탕달은 고베에 가도

퇴근 후 밤에 번역작업을 계속했지. 별로 팔 수 없지만..." 


"밤도 자주 마시지만 아침 3시까지 책상으로 향하고 있는 것도 있었어.

...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여름방학 기간이 없다.매일 조금씩 할 수 밖에 없다." (“두개의 동시대사”)

당시 프랑스에서는 1940년 6월에 침공해 온 독일에게 항복한 후 

독불 휴전 협정이 연결되어 화전파(和戦派)의 비시이 정권 (Régime de Vichy)이 성립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어서 프랑스는 "적국"이 아니었다. 덧붙여서 도골 (Charles de Gaulle) 는 

런던에 망명해 임시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오오카는 전쟁중도 프랑스 문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는 행운도 있었다.

"나는 국민복(国民服, 국가가 제정한 군복에 비슷한 복) 따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뭔가 비국민(非国民)답게 볼 간주되었다. 
나는 오기로라도 스탕달의 원서(原書)를 전철 안에서도 읽고 있었다. 

누군까에게 주의 받으면 이것은 (적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라고… "


전시기에 프랑스 문학을 연구하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와타나베 카즈오( 渡辺一夫, 1901-1975)가 있다.
와타나베는 1901년 9월 출생이기 때문에 오오카보다 8세 연장자가 된다.
1925년에 동쿄대 불문과(仏文科)를 졸업하고 파리 유학 중에 만주사변(1931년)의 보도에 접했다.

" (침략국 국민으로서) 파리에서 중국인을 만나는 것이 힘들었고 

또 프랑스인이 나를 중국인으로 잘못  봐서 동정하는 말을 받아서 괴로운 기분이 되었다." 

(와타나베 카즈오 "노인의 회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가는 일본을 직시하면서, 와타나베는 고독속에서 르네상스 문화사상 연구를 진척시키고  

오오카는 " 스탕달의  시대의 정치와 전쟁을 조사해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오오카 "전쟁")

“1941년부터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동쿄대문학부에 봉직하고 있던 나는 전장에 보내져지 않았지만 

공습과 고발 (告発)을 겁먹으면서 전전긍긍(戦々恐々)하고 있었다.

자경단(自警団)적인 편협 (偏見)과 광신 (狂信)이 환호 (歓呼)의 목소리에 휩싸여

양서(洋書)를 읽는 것은 "비국민"적 행위가 되어… "  ( "노인의 회고")

오오카 쇼헤이와 와타나베 카즈오가 전쟁중에 이런 문학 연구를 계속했고 하는 영위(営為)는 

어떻게 보면 좋을까?  

시대 상황에 대한 "저항"이기도 할 것인데 , 오오카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고 말했듯이 

그것은 좀 더 "내향" (内向)적인  뭔가였을 것이다.

 

( 작가 오오에 갠자부로(大江健三郎)는 도쿄대 문학부 불문과 시대, 와타니베가 선생이었다.)  

 


와타나베 카즈오가 쓴  "광기(狂気)에 대해" 라는 책 (↑) 의 제목을 빌리면 

그들의  영위는 광기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제정신을 간신히 유지하기 위한

일과(日課)와 같은 것이었던 것이 아닐까?  

깨져갈 것같은 자신을 작은 목소리로 독려하고 있다.

물론 이런 일과를 계속했다고 해서 큰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지식인의 "자기 만족"이라고 잘라 버리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중의 "일과"는 결과적으로는 "전후"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며 

또 모순된 말투가 되지만 일본사회전체가 "광기"에 빠졌던 저 "역사"를 잊어버리고

되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일본의 "전후"를 동시에 비판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