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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5) 1937년 “남경 함락(南京陥落) ”

여기까지 작가 오오카 쇼헤이가 자신의 입영, 출정(出征)등 의  군대체험을 둘러싸고 말해 왔다.

그런데 당시 동세대의 1%대에 불과했던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생과 대졸자들은

일본사회가 군국주의에 점점 경사해 가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우선 일본 역사년표를 보면서 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의 "발자국"을 그 시대에 겹쳐 보면…

 

1909년 3월, 오오카 ,출생

1910년 5월, 대역 (大逆)사건...천황암살을 계획했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들을 체포, 사형을 집행한 원죄(冤罪)사건.

1910년 8월, 한국병합 (식민지 지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15년 8월, 내 아버지, 출생

 

1925년 5월, 치안유지법 성립

1925년 12월, 교토학련 (京都学連) 사건…교토대, 도시사대(同志社大) 등 사회과학연구회(학생단체)에 대한 탄압 (치안유지법 첫 적용)

 

1929년 4월, 오오카, 교토대학 입학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 세계 공황으로 확대.

1931년 9월, 만주 사변 (중국 침략)

1932년 3월, 오오카, 교토대 졸업

1933년 타키가와 (滝川) 사건…교토대 법학부 교관에 대한 사상탄압. 교수회, 학생 자치회, 항의

 

1936년 2월, 2.26 사건...쿠데타 미수

1936년 4월, 내 아버지, 교토대학 입학

1937년 7월, 일중 전쟁 (침략전쟁)

1938년 10월, 오오카, 제국 산소(고베) 입사

1939년 3월, 아버지, 대학 졸업

1939년 4월, 아버지, K 조선소(고베) 입사

1939년 9월, 독일, 폴란드 침공

1939년 12월, 아버지, 징병 검사, 현역병으로 입영(24세)

 

1941년 12월 대영미(対英米) 개전

1944년 1월 오오카, 교육 소집, 보충병으로서 입영. 필리핀 전선에 파견해졌다. (35세)

 

1945년 1월, 오오카, 필리핀 민드로섬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다.

1945년 8월, 일본 패전

1945년 9월, 일본군 무장 해제. 내 아버지, 중화민국군의 포로가 된다.

1945년 12월, 오오카, 귀환 (36세)

1946년 8월, 아버지, 귀환 (31세)

 

 

대학 재학 중에 오오카는 만주 사변의 보도에, 내 아버지는 일중전쟁의 보도에 접하고 있다.

학생이었던 이상 그러한 큰 사건에 어떠한 관심을 가져 또, 생각하는 데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어떤 사회상황이었을까?

오오카보다 약 15세 연장자인  시인, 가네코 미츠하루(金子光晴, 1895-1975)의 "절망의 정신사"(絶望の精神史)에서

인용해 본다.

 

가네코는 만주 사변(1931년)의 보도를 체재처의 파리에서 접했다. 파리의 일본인은 "백안시당했다".

귀로  기항지인 페낭이나 싱가포르에서도 "침략제국주의,일본 타도"의 깃발을 세운 화교(華僑)들이

본국의 군에의 헌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거나,

상하이에서는 일본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들어 폭죽을 울려 열광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반대로 일본의 항구에 도착해보니 이 평온함은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을까? "라고 의심했다.

 

“나는, 이 평온함를 민중이, 예측할 수 없는 군 그 자체의 움직을 비판이나 중의(衆議)의 정신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은 달콤한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지식으로서는 어떤 것도 알고 있었던 대신에 그 지식을 역용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은 일본인의 가예가 아닌가." ("절망의 정신사")

 

 

내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출신지의 산간부를 흐르는 작은 강이 평야부에 이르고 넓은 강폭이 되어 바다로 흘러나오는

지방도시의 중학(5년제)에 아버지는 강의 흐름에 따르는듯이 내려 진학했다.

교통이 불편할 시대이었기 때문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27년 무렵이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버지가 입학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중학교에서

"사상 사건 (思想事件, 공산주의,사회주의 운동에 관한 일) "이 일어났던 것 같다.

초등학생였던 나는 사건의 내용까지는 모랐지만 "사상"이라는 말의 "무서운 울림"은 확실히 느꼈다.

 

아버지가 그 "사상 사건"과 관련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아버지를 다른 중학교로 전학시키기로 했다.

 

학생 시절의 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정치적 경향은 분명하게 "보수"이며

생활 태도에 있어서는 스포츠를 사랑하는 "리베라리스트 (liberalist)"였다.

나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도 많이 있었을 것인데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가 쓴 짧은 문장을 "발견"하고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한 절이 있었다.

 

"쇼와 12 (1937)년  (대학) 재학중에 남경 함락 (南京陥落)의 제등 행렬을 보고 복잡한 기분이었습니다."

 

"남경함락"은 일중전쟁이 시작된 1937년 12월 일본군이 중화민국정부의 수도 난징을 공격해 점령한 것을 말한다.

이때 이른바 "남경 사건'"(대학살)이 일어나고 있다.

개전 5개월후 "적"의 수도를 "함락"시켰다는 것으로 일본 국중이 전승(戦勝)기분에 빠졌다고 한다.

전국 각지 (대도시에서 마을까지) 에서 연일연야 제등 행렬이나 축승행사가 행해진 것 같다.

주최는 행정, 신문사, 지역의 자치 조직 , 학교, 청년단 등…

말하자면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남경 함락"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병에 걸렸던 듯이 조직된 것이다.

 

(↓"남경 함락"제등 행렬, 일본 난고야 名古屋)

 

내 아버지가 쓴 "복잡한 기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전승(戦勝)" 무드에 취한 사람들의 떼를 보고 리버럴한 (liberal) 공기조차도 압살되어 가는 시대에

암담했을지도 모르고 또 졸업 후 징병 검사를 받아 그대로 입영, 전선에 보내지는 "자신의 가까운 미래"를

마음에 그려  "복잡한 기분"이 된 것 지도 모른다.

 

시인의 가네코 미츠하루는 일중개전 직후에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

배로 천진(天津, 베이징의 외항)에 도착했다.

 

"천진은 미친 소란이었다. 이미 거기에 모여 오고 있 는엄청난 수의 일본인은 "화재 현장에 온 도둑"이며

침략한 중국을 어디에서 물면 좋을까 리고 조사하러 온 놈들이었다.

오오사카(大阪)의 도톤보리(道頓堀,번화가)에서 진출해 온 큰 카바레는 밤도 낮도 없고,

그러한 놈들으로 대단히 혼잡하고 있었다."  ("절망의 정신사")

 

"전쟁 반대"의 목소리는 압살(圧殺) 당했다.

가네코의 중국에 있는 일본인의 지인도 헌병에 의한 고문으로 죽었다.

그러나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 서민들도 제등 행렬에 참가하거나  전쟁을 통해서 돈을 벌려고 해서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탄 것이다.

패전후 "군부가 나빴다", "서민은 피해자였다"고 하도라도 아무런 의미는 없다.

 

그런데 시인 가네코 미츠하루는 일중개전 직후에

베이징(北京)의 공중 변소에서 만난 한 노인에 대해 쓰고 있다.

역사학이나 정치학의 책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이런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문학자들의 책의 매력이다.

그러한, 중국의 한 노인과 가네코와의 만남에야말로 "역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가네코가 서둘러 들어온 공중 변소 속은 어둡고 통(변기)이 몇 개 있어 가네코도 거기에 앉었다.

 

"보면 나와 마주 보고 한 노인이 앉고 있다. 침묵인 채 두 사람은 용변을 보고 있다.

머지않아 노인은 종이를 4등분으로 잘아서 네 장 중 두 장을 조용히 손을 펴서

나의 쪽으로 내밀는다.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받았다......

일반적인  민중 속에는 아무래도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은,

또 대국의 민중다운 인간이 있다.

그런 사람을 힘든게 하지않도록 일본군은  침략을 중지해야 한다”라고

가네코는 생각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오오카(大岡)와도 공통되는,

전쟁을 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의 중요한 시점이 제시되어 있는 것 같다.

 

작가 오오카 쇼헤이가 일본이 진행하고 있던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 그 전쟁에 가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언급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