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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4) 아내와의 면회

한 사람과만이라면 면회가 허용되됬다.

오오카는 고베에 남긴 아내를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내가 전선으로 보내져 패군 속에서 죽는 것은 같은 일이다.

 (아내와 만나는 것은) 미련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출정", 이하  같다)

 

그리고 가족을 대신해 면회에 오는 친구에게 유서를 맡기기로 했다.

 

(↑ 유서, 일부)

"살아 돌아갈 생각이지만 죽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쩌면 혼자서 아이를 키울 생각이 되겠지만

 그것은 반드시 나의 소망이 아니다. 행복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재혼하기에) 헤매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료의 한 사람으로부터 "너는 그래도 좋을지도 모르지만  부인의 마음 속을 생각해보라.

한 번만으라도 만나고 싶을지도 모르겠잖아! " 라고 충고해주었다.

오오카는 이 충언을 솔직하게 따랐다.

 

면회의 날 아침 (1944년 6월 16일), 고베에서 오는 아내를 도쿄역에 맞이하러 갔다.

그러나 아내는 다음의, 그리고 그 다음의 열차로도 오지 않았다.

오오카로부터의 연락이 늦었기 때문에 기차에 탈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 부대는 시나가와역 (品川駅)에 향해 대열을 짜 출발했다.

군용 열차를 기다리기 위해 역 앞에서 잠시 쉬었다.

그 때 "오오카!  면회다! "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났다.

 

“보니 거기에는 꿈처럼 아내가 서서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아내의 모습에 내가 죽은 후의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내 쪽에서는 변해버린 내 모습에 "죽음"을 보았다고 (후에) 말하고 있다."

 

행운이 겹쳐서  발차 직전에 처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내가 "어린이용의 작은 수통"에 넣어 온 배급 술을 마셨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이 나왔다.

아내도 묵묵히 울고 있었다.

 

"이 장면은 〈오오카와 마누라, 시나가와 역두 눈물의 이별 〉이라고 해서

이래 오랫동안 분대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오오카는 이야기가 음침한 것이 되지 않도록 이렇게 써고 있는데

같은 보충병인 동료들의 이 놀림에는 "오오카!  댈 수 있어서 정말 좋았구나! "라는 마음의 소리도

겹치고 있다고 느껴지다.

아무도 모두 가족과 "최후 의 이별"을 했으니까...

 

분대는 대열을 다시 짜서 역 구내에 들어갔다.

아내는 역 앞의 노면 전철 정류장 위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오오카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여서 앞을 향했다. 역 구내에 들어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되돌아보자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을 억제해 버렸다."

군용 열차는 화물선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나가 생각하는 것은 내 부모님의 경우다.

돗토리(鳥取)의 보병연대에 입대해 신병교육을 받은 후 아버지는 "만주"에 간다.

그 직전에 어머니는 연대에 면회에 갔을 것일까?

그리고 1940년의 어느 날, 24세와 20세의 남녀는 무엇을 서로 이야기했던 것일까?

 

오오카는 시나가와역에서 행운에도 처자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운의 연속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반대로 뜻밖에 나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후일에) 말했다."

 

 

나의 부모도 그 면회의 날, 입에는 나오지 않아도 같은  일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산간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는 해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는 중학 진학시에, 어머니는 여학교 진학시에 각각 마을을 떠나 가장 가까운 도시로 나왔다.

현지에 상급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가는 어느 쪽도 부자가 아니었지만 아이의 교육비를 지불할 여유는 있었다는 것이다.

 

A씨라는 사람이 고베에서 개업의를 하고 있었다.

그  A씨 부부와, 아버지의 친가, 어머니의 친가가 먼 친척였다.

고베의 조선회사(造船)에 입사할 전후 아버지가 A씨 집에 놀러 갔고 거기서 어머니를 소개받았다.

그런 일이었던 것이 아닐까?

 

전쟁이 없으면 고베에서 그대로 가정을 꾸렸을것이지만

만난지 반년후의 "징병 검사→현역 입대"라는 흐름을 생각해,

아마 부모는 "혼인 신고"는 나오지 않고 "약혼" 만을 한 것같다.

 

1939년 4월에 아버지는 K 조선소에 입사, 같은 해 12월에 입영했기 때문에

고베에서의 두 사람의 교제은 반년으로 끝났다.

부모가 함께 살던 모습은 그리기 어렵다.

아버지는 회사 기숙사에서 살고 어머니는 A씨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휴일에 만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나에게는 "자연"이다.

 

고베의 "제국 산소"에 근무하고 있던 오오카 쇼헤이가 직장 결혼한 것이 1939년 10월이기 때문에,

바로 같은 시기가 된다.

"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2)"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오오카는 아내가 되는 사람과 "이쿠타와 카자미 도리" (산노미야, 기타노 지구)에 놀러 갔다.

내 부모들도 그런 곳에 나갔을까?

아니면 "신카이치" (新開地, 영화관,극장의 거리)에서 외국 영화라도 본 것일까.

 

반년의 한정된 관계이었더라도 그만큼 만날 수 있는 날에는 보통 "젊은 두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있었던 것을 바란다.

 

 

( ↓ 나카야마테(中山手) 카톨릭교회. 키타노(北野) 지구에 있었다.

 1929년 준공. 오오카 쇼헤이도 내 아버지도 이 교회를 보면서 약혼자돠 함께 키다노 지구를 산책했을 것이다.

 1945년 공습으로 손해. 그후, 수리 재건.

  A씨의 집 근처에 있었다. 나도 어렸을 때 (A 씨 집에 갔을 때), 이 교회의 부지에 들어가 잘 놀았다.

 그러나, 1995년의 대지진으로 도괴했다.

 참 슬픈 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