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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한국

가네다 씨의 눈물 (1)

어렸을 때 고배항(神戶港)이 바라보이는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5학년 때였을까 (1960년 경) 어느 날 자습시간에 "사건"이 일어났다.   

담임의 М선생은 때때로 학생 쪽에 시선을 돌리면서 교탁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M선생은 갑자기 "가네다(金田), 너의 가족은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한 여학생에게 향해 물은 것이다. 
자습하고 있었던 학생들의 손이 일제히 멈추고 교실내의 공기가 긴장했다. 
모두는 눈은 책상에 떨어뜨린 채, 가네다(*) 씨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학교 지구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있고 가네다 씨의 본명이 "김"씨이고 그녀가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교실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네다 씨의 울음소리이었다. 지기 싫어하는 그녀가 울고 있다.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하는 교사의 질문의 의미를 나도 포함해 클래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실이 그 말 한마디로 얼어 붙은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 "복잡한  일"에 관계되는 이야기다고 하는 것만은 직감하고 있었다.  (교사는 외국적(籍) 학생의 조사보고 서류를 만들고 있었던 것일까? ). 

나도 그 질문의 의미는 잘 몰랐지만 제대로 자습을 하고 있었던 가네다 씨가 울기 시작한 이상 나쁜 것은 학생 모두 앞에서 그녀를 울린 교사인 것은 분명했다. 
"그녀를 울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고 그것만을 강하게 생각했다. 
교사 (어른이)에 대한  좋아하고  싫어함은  그때까지도 있었지만 "용서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것은 아마 첫 경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허용할 수 없는 것인가"... 그 설명을 할수 없었다. 
선생이 잘못한다고 직감했지만 그에게 항의하는 말도 논리도 몰랐다.
나는 울고 있는 가네다 씨를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자신이 한심했다.
가네다 씨는 목소리를 억누르게 울고 있었다. 
그것은 교사에게 대한 무언의 항의인 것 같았다. 

한일 국교회복 전,  "인권교육"도 "다문화 학습"도 아직 없는 가혹한 시대...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교육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그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 말”과 "논리"를 가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문제였다. 

 

가네다 씨는 학교에서 당한 "사건"에 대해서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견뎠다.
민족단체가 항의하러 학교에 왔다는 기억도 없다. 

 

↑  내가 다녔었던 초등학교 (왼쪽 아래) 의 옥상에서는 항구가 잘 보였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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