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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한국

가네다 씨의 눈물 (2)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자습 시간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 같이 끝났다. 
다음 가정과  수업에는 담임의 М선생을 대신해 여자 선생님이 온다. 
그것은 이날에 한한 것이 아니고 평소의 일이었다.
같은 반의 놀이 친구인  야스다 (安田) 군이나  시라이 (白井) 군은 교실을 빠져 나갔다.
가정과 수업이 되니  (무서운 М선생이 없기 때문에),  2, 3명이 교정에 빠져 나가고  멋대로 노는 것이 자주 있었다. 
선생님이 교실에 되돌아오게 부르러 갈 것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날"은 되돌아 오지 않았다. 
야스다 군도 시라이군도 재일 코리안이였다.
왜 그 날, 그들은 교실에 되돌아 오지않은 것인가, 그 까닭을 나는 상상했다. 

(야스다군은 "안"군이고  시라이군은 "백"군이라고 후에 알게 됬다.)  

그런데 나가 고배(神戸)의 소학교에 전학한 첫 날, 나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다른 반의 아이들에게서  매복을 당했다.  그 때,  운 좋게 야스다군들이 지나가고  나를 구해주었다.
그 후 나는 야스다군이나 그의 친구들과 친해졌은 것이었다.  

그들은 전학해 온 나에게 낯설은 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작은 주머니 (공) 같은 것을 발 내측으로 차 올리는 놀이다.
soccer의 lifting같은 놀이.....
어렵지만 즐거웠다.
 누가 제일 많이 할 수 있을까, 학교 운동장에서 경쟁했다.
"チャン蹴り (창게리)" 라고 부르고 있었다.
20년 후 한국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돼서  "창게리"는 혹시 "제기 (차기)" 라는 놀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야수다군들은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도 자기 자신의 문화를 이어받고 그 것을 일본아이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전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가네다"씨의 이야기를 할까 말까, 좀 망설였다.
당시 한국사람들이 일본에서 직면하고 있던 슬프고 아픈 일만을 강조하듯이 쓰면 오히려 그들의 주체성을 경시할 것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야수다 군들과의 사귐을 생각나면서 그가 나에게 놀이를 가르친 "주체"이던 듯이 가네다 씨도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선생 (아니, 일본사회)에 대하여 존재로서 강하게 항의하는 ”주체”이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다시 생각했다.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그 자세가 내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이 좀 편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여기서, 나는 가네다 씨에게서도  또 야스다 군에게서도   "인간"으로서 소중한 것을 배웠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보고 싶다.
내 자신의 "말"과 "논리" 를 가지기 위해서는, 또 그 것이 자신 의 육체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인생을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옛날은 사회에 인정 (人情)이 있었다"라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부정은 하지 않지만  그 "인정"란  어느  "조건"으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의 일본"라는 말을 듣고, 내가 먼저 상기하는 것은 " 가네다 씨의 눈물" 이다. 
가네다 씨는 "인정" 에 접해서 운 것이 아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가네다 씨는 전학해 갔고 야스다 군은 졸업한 후 취직했다. 
나도 그 후, 그 지역에서 다시 이사했다.

 

↑ 우리가 다녔던 소학교. 다른 학교와 통합되어서 1994년에 폐교되었다. 1921년에 건축된 교사가 그대로 마지막 날까지 사용되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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