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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아버지들의 전쟁...오오카 쇼헤이, 그리고 내 아버지 (8) 분노와 슬픔과...

 

오오카 승평은 "레이테 전기(戦記) "를 집필 중인 1967년 3월, "전적 위문단 (戦跡慰問団)"에 합류해

필리핀 레이테 섬, 그리고 자신이 포로가 된 민드로 섬을 방문했다.

저작 "민도로 섬, 다시"는 그 기행을 정리한 것이다. (1969년 간행, 이하 "민도로 섬"이라고 약기)

 

 

그 방문보다 약 10년 전, 필리핀 그 외, 남태평양의 섬들을 돌고 유골을 수집하는 배가 출항한 적이 있었다.

오오카는 출발 일주일 전에 그 배가 민도로 섬에도 들르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너무 가파른 것으로 참가하는 것은 할 수가 않고

그 유골수집선 "은하 마루(銀河丸)" 의 출항을 텔레비전 뉴스로 볼 뿐이었다.

 

"부두에서 (배를 배웅하는) 유족이 울고 있었다.

나도 눈물을 흘리고 방으로 돌아와 시 같은 것을 썼다.

..... 

야,  전우(戦友) 여러분

이토(伊藤), 마후지(真藤), 아라이(新井), 구리가와(厨川), 이치키(市来),

히라야마(平山), 그리고 또 다른 이토(伊藤),

그 외,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산호세(San José, 민드로 섬의 도시)에서 죽은 동료들,

…..

연습선 "은하 마루"가, 모두의 뼈를 모으려고 오늘 도쿄를 나온 것을 보고합니다.

그때부터 13년이 지난 오늘이라도 부두에서 울고 있던 여자들이 있었음을 보고합니다.

오래전에 뼈가 되어 버린 모두를 아직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 있는 것야.

 …

여기에서 이렇게 말을 쓰고 울적함은 달래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유감스로운 일니지만,

유감스로운 것은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다.  

한심한 마음으로 나는 역시 살아 있다.

이해해주는 것은 여러분 뿐이라고 이 날, 이 때, 알았던 것이다.."

("민도로 섬" )

 

그때부터 10년 후, 오오카는 드디어 민도로 섬행을 완수한 것이다.

(그 섬에서) 오오카는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행자를 떠나 혼자 되었다.

이전에 소속된 "중대 본부"가 놓여져 거기서 전우들이 죽고

오오카 자신도 미군병과 조우해서 포로가 된 "루타이 고지(高地)" 쪽을 향해

앉고 머리를 숙여 전우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의 죽음은 비참했다. 우리를 이러한 시시한 전쟁터로 몰은 군인(참모등) 모두는 악당이었다.

게이코(芸妓.기녀) 상대에게 맛있는 술을 마시면서 "필리핀 결전" 따위 허풍을 떨고

국민에게 "필승의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무책임한 데에서 타결 짓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 

(a) 너희는 죽고 나는 살았다. 우리들은 대강 35세였고 자신의 비참함을 잊기 위해 모두 생각이 깊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든 총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결정하는 동기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부터 어떻게 살겠울까에 대해 어떤 높은 도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b) 내가 여기서 (민도로 섬) 전우들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의 주의(主義)다. "

("민도로 섬")

 

오오카는 죽은 전우들에게 무엇을 약속했을 것이다.

이하는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

 

(b)에는 "할 때까지는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있다.

"할 때까지"라는 말을 보니 오오카가 전우들에게 약속한 것은,

추상 적인 무엇인가 (평화를 지킨다든가)라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무엇인가 (행동)이었던 것을 상상시킨다.

 

우선 그것은 "레이테 전기(戦記)"를 그들을 위해서도 다 쓰는 것이다.

전회 인용한 "레이테 전기"의 "후기"를 보니 그것은 엿보인다.

 

다음에 내가 생각나는 것은 1971년( 민도로 섬을 방문한지 4년 후) 오오카가

"일본예술원"(日本芸術院) 의 회원이 되는것을 사퇴한 "사건"이다.

 

이하는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

 

“필리핀에서 포로가 된 것이 부끄러워서 예술원 회원 등이라는 국가적 영예는

아무래도 받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천황(天皇)  앞에는 나올 수 않습니다.”

(오오카의 담화,1971년 11월 30일, 요미우리 신문)

 

"일본 예술원"은 뛰어난 예술가를 우대하는 국가적인 영예 기관이며,

매년 6월에 천황·황후의 임석 아래, 회원 시상식이 행해진다.(“위키피디아”).

 

오오카는 작가,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와의 대담("두 개의 동시대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 사퇴의 말(談話)은 그때 문득 나왔던 것이 아니다. ....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말하고 있었어.  회원이 될 타진이 이제 곧 올 시기라고...”

 

 

이미 작가로서 "대가(大家)"가 된 오오카는 슬슬 예술원 회원에게 추천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 수상은 "국가"레벨의 공식적인  행사이며, 천황(天皇)도 임석한다.

오오카는 사퇴의 이유를 자신이 포로가 된 것 을 들고 있지만(구 일본군은 포로가되는 것응 금하고 있었다),  

그 "영예"를 사퇴하는 것은, 오오카 자신이 약간의 우연으로"살아남았다"라는 것,

끊임없이 죽은 동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자신을, 그리고 전쟁을 계속 물어 오고,

또 앞으로도 계속 물어가는 의사의 표현일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전쟁이 추진되어 그 이름을 외치며 죽어간 동료도 있었다.

그 '"천황제(天皇制)"를 지키기위해 헛되이 항복(降伏)이 미뤄지고

더 많은 병사, 비전투원 (외국인도 포함)이 희생되었다.

그 죽은 자들을 놓아둔 채, 천황 앞에 나와 천황으로부터 말을 받는것,

즉 천황제에 끌어들여지는것은 할 수 앖다, 그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사자(死者)들의 쪽에 서겠다는 각오를 거기에 읽을 수 있다.

 

오오카는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다. 한심한 마음으로 나는 역시 살아 있다.

이해해주는 것은 (전우의 )여러분 뿐..."라고 ("민도로 섬")

그 십년 전에 전우들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아닌가?

 

1970년 전후...시대는  바로 고도 경제성장으로 돌진하는 일본.

점점 "건망증"에 빠져가는 전후사회 속에서 오오카는 고독했다.

그리고 혼자서 사자(死者)들을 상기하면서 그들과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상대는 "전사자 〇만명"(戦死者〇万名)으로서 "숫자"로서 표해지는 "추상의 죽음"은 아니다.

"이토, 마후지, 아라이, 이마가와, 이치키, 히라야마, 그리고 또 다른 이토"라고 오

오카는 그 "고유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내 아버지들도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에는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에는 죽은 전우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전우회"의 장소에서 틀림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다음에  민드로 섬에서 오오카가 죽은 전우들에게 말한 (a)의 서술 부분에 주목해 본다.

(a)는 이 부분만으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단편 "출정(出征)"에는 (a)와 관련된 서술이 있다.

 

(c) “나는 자신이 어리석은 것(인용자 주:무의미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대로 흘러져 온 일)을

통감했지만 이것이 이상(理想)을 가지지않는 내 삶의 필연(必然)의 결과였던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이상을 가지지 않은 것은 같다.

단지 이 어리석음은 한개의 평생 속에서 반복하면 안 된다. 그것은 굴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출정")

  

(a)의 “”우리가 평소부터 어떻게 살겠울까에 대해 어떤 높은 도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라는 부분은  

(c)의 “이상을 가지지 않는 나의 생활”과 대응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a)는, 35세의 어른으로서 세상의 고생도 핥아 사려깊었지만

견해를 바꾸면, 그것은 처세(処世), 자기 보신(自己保身)에 흘러져 왔다고 하는 것이며,

그 "필연의 결과"로서 어찌할 방법이 없고 무의미한 전쟁에 몰아졌던 것이 아닌가, 라는

통한(痛恨)의 자기반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이 어리석음은 한개의 평생 속에서 반복하면 안 된다"고

오오카는 전우들이 잠자는 "루타이 고지(高地)"쪽을 향해 머리를 숙여   

약속하고 또 자계(自戒)한 것이 아닐까?

 

 

"전쟁" (오오카,1970년)에도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있다.

 

“나는 그러한 전쟁이 되는 경과를 봐 온 인간으로서, 병사로서, 전쟁경험을 가진 인간으로서,

전쟁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언제까지나 말하고 싶습니다.”

 

또, "권력은 언제나 발소리를 죽이고 오는 것이요"라고도....

 

 

그렇게 오오카가 쓴지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1960년대 말, 막 오오카가 "레이테 전기"의 집필과 격투하고 있을 무렵,

베트남 반전 시위 속에 있던 한 학생은 지금 70세를 너머 오오카 쇼헤이의 작품을 다시 읽고 있다.

 

전쟁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 아니, 나 쪽에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자세가 없었던 것이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나도 뭔가 "약속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있다.

 

" 어째서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는가"라고 아버지에게 물어본 그 물음은

50년 후, 이번에는 그대로 나 자신을 향해 돌아온다.

 

 

(다음 기사로  "아버지들의 전쟁"은 끝납니다.)